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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유회>
박성아
2024년 3월 19일 ~ 2024년 4월 2일


다시 눈을 감은 곳에서: 보는 것, 닿는 것, 숨 쉬는 것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소묘 작업에 대해 말하면서, 흑연과 종이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흑연의 응집으로] 종이는 그의 순진함이라는 잠을 깨워, 하얀 악몽에서 일어난다”(「물질과 손」) . 정확히 말하면, 이 구절은 ‘소묘 작품의’ 설명이 아니라 ‘소묘 작업’, 즉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손으로 물질을 다루는 ‘일’에 대한 문장이다. 손이 흑연이나 종이, 그외에도 다양한 물질을 만나 세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순진함의 잠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재료의 깨어남은 또 다른 잠, 그곳에서 꾸는 꿈이 되어 나타난다. 바슐라르는 또한, 인간의 손에 의해 실현되는 의지를 몽상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 종이가 잠에서 깨어날 때, 같은 자리에서 손에 의해 꿈이 펼쳐진다. 이때 손은 계산과 결정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몽상이라는 의지를 통해서 서로 다른 재료를 대면시킨다—그렇게 해서 손은 탄생한 작품과 보는 사람을 대면하도록 이끌어준다. 작품과 보는 사람의 만남은 재료와 작가의 손의 만남에서 전개된, 또 다른 잠에서 꾸는 꿈이다. 

작가가 담은 의지가 그의 손을 떠나, 어떻게 꿈으로 펼친다는 것일까? 꿈을 이끈 손길, 이 접촉은 보는 일로 역할이 양도된다. 박성아의 캔버스 회화와 패브릭에 담긴 판화 작업에서 우리는 낱장의 꿈을 시각적으로 공유받는다. 마치 창에 서린 김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마치 추억 속에서 넘실거리는 바닷가의 잔물결처럼, 작품에는 이미지가 어렴풋이 평면에 부유하고 우리는 이를 본다. 손처럼 재료를 직접 건드리는 일은 없어도, 눈은 작품에 닿는다. 시선에 의한 접촉은 작품에 기록된 접촉을 알아보고 이를 눈여겨보도록 한다. (그러고 보니, 시선은 대상이라는 뚜렷한 존재뿐만 아닌 불확실함이나 모호함에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물감이 캔버스에 닿고, 그곳에서 형태가 되고, 비유를 만들어낸다. 서린 김, 비눗방울, 잔물결—이런 비유들은 헛되거나 뻔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종이의 깨어남과 마찬가지로) 재료의 깨어남을 대면하는 일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의 입김을 만난 유리가, 얇은 막에 비친 공간이, 그리고 상기된 어린 시절이 잠에서 깨어나 또 다른 잠에서 꾸는 꿈에 살도록 안내한다—재료, 작가, 보는 사람, 이 모두를.

《촘촘한 유회》라는 전시 제목은 세 가지 유회를 가리키는데, 모두 하나가 되어 작품에 나타난다.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말하는 유회(油繪)가 있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말인 유회(遊回)가 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품은 생각을 말하는 유회(幽懷)가 있다. 재료와 움직임, 그리고 생각을 뜻하는 세 단어가 어우러져 작업과 전시에서 촘촘함을 이룬다. 작업에서 펼치는 것들은 탄력을 지닌다. 재료인 천/패브릭은 틀에 고정되기도 하며 전시장에서 살랑이기도 한다. 물감과 잉크, 모양새와 이미지는 재료와 매체를 오가면서, 손을 거쳐 작가의 마음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 옮겨 풀어낸다. 탄생한 작품은 피부처럼 얇고 또 튼튼한 모습을 한다. 흔히 덧없고 얇은 형상에 빈번히 따라다니는 표현이 ‘피부’인데, 박성아의 작업에서 이 비유는 닿는 것과 호흡하는 것으로써 펼쳐진다. 시각적인 접촉과 호흡은 평면 너머 투과되는 것을 만난다. 피부는 닿는 것을 전제한다—물건이나 사람에 닿기.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피부는 호흡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말(을 )하자면 공기에/가 닿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숨을 내쉰다. 

캔버스 화면은 천과 물감의 만남, 재료와 손의 만남을 통해서 깊이에 접촉한다. 물론 이 깊이는 회화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하지만 판화 작업에서 패브릭 너머 보이는 공간이 실제 깊이를 가진 것처럼, 캔버스에 맺힌 형상 너머 펼치는 깊이감은 실제적이다. 작가의 내면만큼, 작가의 생각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가 손으로 만든 만큼, 현실감이 넘치는 곳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물감이나 잉크, 그리고 형상처럼 이곳에 접촉한다. 잠에서 깨어난 종이가 그러하듯, 작품을 대면한 우리는 잠을 저 스스로 깨운다—손 대신 눈으로. 그러고 나서/그러면서 마치 꿈을 꾸듯이, 작품은 감은 눈의 호흡을 보는 사람에게 현실로 가지고 온다. 꿈은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꾸는 것, 즉 현재진행형이다. 설령 우리가 미래에 바라는 일이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떠오른다고 해도 말이다. 피부처럼 얇고 층이 쌓인 곳에서, 넘실거림과 깊이감의 탄력이 함께 존재하고, 그리고 함께 펼쳐, 이미지가 된다. 

글 : 콘노 유키
사진 : 김지수
포스터 디자인 : 에센스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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