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란
2026.10.28(수). - 11.09(월).
13:00 - 19:00
기획: 이유민
촬영: 최철림
사건과 흰 그림자
전시가 끝난 후 전시장은 강도가 든 것처럼 비어 있다. 벽에는 작품을 지지하던 여러 개의 나사못이 있고, 바닥에는 전시 기간 동안 쌓인 먼지 뭉치가 드문드문 보인다. 전시는 하나의 사건이다. 우연함과 계획이 복잡하게 얽힌 일이다. 공간이 한 움큼 물고 있던 작품들을 뱉어내면, 조금씩 상처 입은 벽들을 마주할 수 있다. 운영자의 일을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벽에 난 구멍을 메우고 사포질하며 다시 전시하기 좋은 모습을 조성한다. 희끗한 퍼티 자국을 흰색 페인트로 덮으면 벽은 이제 새로운 작품을 걸기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은 전시가 시작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고 끝나기를 반복할 때마다, 느리게 삭는 공간을 재생하는 운영자의 노동이 뒤따른다. 《HAPPEN!: 사건 뒤의 흰 그림자들》은 전시라는 사건 뒤에서 노동하는 운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시 공간 운영자이면서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두 정체성 사이를 오가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노동을 경험해 왔다. 이러한 교차하는 정체성은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는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두 가지 방향의 작업을 선보인다. 신작< 깔끔한 벽을 만들자 >, < 너무 오래 흰색을 바라보니까 눈물이 나네 >, < 암흑, 시행착오 >, < 가라. 청소특공대 >는 전시장을 재생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벽면 보수와 사포질, 청소와 페인트칠 등 공간을 복구하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 절체절명 >, < 펑! 새로운 곳으로 >, < 샤랑. 실낱같은 빛이 내게로 >, < 집으로 가긴 아직 이르다 >는 화면 속 NPC들을 결코 현실의 노동자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이 작업들은 노동 속에서 익명의 존재였던 NPC를 소년만화의 서사 구조를 빌려 사건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이 화면 속에서 NPC는 절체절명의 순간 새로운 힘을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며, 끝내 살아남는다. 현실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러한 장면들은 노동하는 존재가 주인공이 되는 또 다른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이는 노동을 낭만화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판타지가 아니다. 반복되는 노동이 반드시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과 달리, 성실한 노력이 보상받는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회화 안에서 다시 질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운영자와 작가의 노동은 공통적으로 반복과 축적이 요구되지만, 그 노력이 언제나 동등한 보상이나 인정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다. 전시장을 유지하는 노동은 전시가 시작되는 순간 보이지 않고, 예술가의 노동 역시 사회적·경제적으로 보상받기는 어렵다. 작가가 경험한 두 정체성은 한편으로 현실의 노동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동 주체가 주인공이 되는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따라서 본 전시의 두 방향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두 개의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HAPPEN!: 사건 뒤의 흰 그림자들》은 전시라는 사건 뒤로 쉽게 휘발되는 노동의 시간을 회화라는 구체적 물질로 정착시키는 시도이다. 동시에 노동 주체가 현실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026년 10월 이예란
✽‘NPC’는 게임 속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를 의미하는데 게임의 배경을 채우거나 진행을 돕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유령형태의 캐릭터를 부를 때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