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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실험 064
< 알몸과 옛날 작업 부산물의 콜라쥬 >
김주눈, 김지윤
2025.12.23 - 2026.01.05

*오프닝 리셉션: 12월 23일 17:00 - 19:00
간단한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윤과 주눈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괴로움을 공유했다. 
둘에게 정말로 괴로운 것은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통제한다는 것.

‘그림이 내년에는 더 늘어있어야 하고, 나는 좀 더 완벽한 회화로 나아가야 되고, 다음 스텝으로 가면 언젠가는...정
신병은 꾸준히 약을 먹어 낫게 해야 하고 나는 수치스러운 비밀을 감춰 더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하고...’ 주눈은 이
런 생각이 항상 자신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가속도가 붙은 태도를 스스로 멈추기에는 어려운 상태였다.
지윤과 주눈은 일과를 마친 밤에 주로 만나 맥주 한 잔을 했다. 여러 알바를 하고 나면 둘이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은 밤과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지윤은 주눈의 이런 무기력한 상태에 대해 공감하면서 자신이 얼마 전 비슷한 경
험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상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미술을 시작했을까

“사실 미술을 한다는 생각도 모르게 놀았던 것 같아. 손으로 뭔가를 주무르고, 종이를 이어붙이고 낙서를 하는 게 좋
았어. 세상의 속도에 맞춰 흘러가다 보면 우리는 노는 게 뭔지 망치는 게 뭔지 좀 잊는 것 같아. 나는 내가 모으고 겪
은 것들로 놀이하고 사건을 회피하면 그나마 좀 살 것 같더라.”
둘은 테이블에 앉아 말 못 할 비밀이나 친구관계라든지 하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불안함을 잠시 잊
었다. 쓸데없는 농담으로 깔깔대는 밤이 이 시기 둘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손으로는 서로가 그동안
모아둔 재료를 쥐고 자르고 엮으면서 의미를 벗어난 목적 없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

지윤은 주눈의 집 높은 언덕을 걸어 올라올 때면 항상 양손에 가득- 그날 아동미술 수업에서 쓴 재료나 일 할 것들,
그날의 식량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 그것들은 지윤의 놀이 재료가 되었고, 
주눈의 놀이에도 지윤의 태도가 스며들었다. 
지윤도 마찬가지로 주눈이 쓰던 그림 재료나 유치한 비즈 같은 것들을 빌려 벌레 모양, 고양이 장난감 같은 것을 만들었다.

처음 이 방식을 시작할 때는 둘이 어울리지 않는 각각의 상태로 머물렀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다름이 서로 어울
릴 수 있는 상태로 변화했다. 마지막에 둘은 작업물을 서로 기대어 놓기도 하고 겹쳐보면서 그간에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머릿속에는 뒤죽박죽으로 공유된 내용들이 떠다녔고 생각해 보면 손으로 뭘 만드는 시간 외에도 중요한
순간이 있었다.

주눈은 최근 몇 개월 동안 잠을 많이 잤다. 돈을 벌어 미술을 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것,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서 다른 작가들을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것, 전시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 결국에는 그리고 싶은 게 없어지
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주눈은 지윤에게 실험하는 취지로 함께 공동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쉽
게 무기력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주눈은 대부분 잠을 자거나 놀았고, 잠깐 깨어있는 시간에 알몸 상태의 자신을 그
림으로 그렸다. 겨우 중간중간 지윤이 응원을 해줘야 일이 굴러갔다. 그렇게 주눈이 밤을 새우고 늦게까지 자고 있
었을 때, 지윤은 먼저 일어나 할 일을 하며 주눈을 기다렸다. 주눈은 작게 들리는 타자 소리와 물 잔 기울이는 소리
에 지윤이 자신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주눈 글


실험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내게 미술보다 자유로운 인상을 준다. ‘실험전은 완성된 형태의 작업보다는 작
가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실험적인 방법의 전시를 지원하고자 진행됩니다’ 는 파도의 실험전 공모 공고의
일부인데, 스트레스 받는 공모 싸이클을 회피하다 지원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이유도 실패가 허락된 느
낌 때문이 컸다. 마치 학생 때 수업에서의 과제전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창작을 하는 행위는 실험과 다를 바
없어야 할 듯 한데, 학생을 벗어난 ‘신진 작가’로 어쨌든 나이를 먹어가는 작업하는 사람에게 전시는 어딘가 완
벽한 실험이어야 할 것만 같고, 미술이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된 상태가 축적되어 힘들었다.

김주눈 작가도 비슷한 힘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작업에서 새로운 것 해보고 싶은데, 같이 할 사람이 나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고(다른 이유보다 젤 기억에 남음), 나도 김주눈 작가 작업에서 어딘가 비슷한 시선(우울
하지만 따뜻하기도 한...애잔....) 을 느껴 같이 해보자 했다. 2월부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각자 자기 작
업에서 멋대로 발전시켜보고 싶은 것 해보자고 응원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서울에 올라가는 날 김주눈 작가의
자취방에서 수다를 떨다 자고, 아침에 일어나 손을 움직이며 각자 뭔가를 만들고 또 수다를 떨었다.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서툰 구석을 마주해야 함에도, 나를 매우 신나게 한다.

작년부터 조카랑 영어미술수업을 가장한 놀이를 해오고 있다. 내가 가져온 재료들로 이것저것 열심히 붙이길
래 “이건 뭐야? 파란색 뱀같다” 또는 oo 같아! 라고 말할 때마다, “아니야! 이건 ‘아무도 모르는 그림’이야!” 라
고 조카는 답했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 덕분에 아는 것이 많아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해방감도 느껴
왔지만 동시에 자동반사적으로 현상을 분석하려 하고, 알기(안다고 생각하기)전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게 되
버린, 발이 묶인 것 같은 태도에 대한 답답함도 떠올랐다. 자신도 뭐하는지 몰라서 모른다고 할 수도 있긴한데
매우 확신에 차서 말하는 그녀를 보고 ‘뭐하고 있는지 몰라도 되는 그림’의 모습을 떠올리며, 근래의 나는 살아
가는 것 그리고 작업이라는 행위 속에서 모른다는 것의 소중함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또 그 소중함이 타인
과, 세상과 맺는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번 실험전에서는 함께한 김주눈 작가, 5세 아이들의 미술 수업과 조카와 보낸 시간, 새로 들어간 홈리스 행
동의 문화와 친구들, 수도권과 떨어진 안성, 집안일, 안부 연락, 버스를 경유하며 새롭게 감각한 과거와 현재
의 경험을 도식화할 수 없는 진행 중인 이야기가 되길 바라며 기록해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풍경화 같기도, 추
상화 같기도, 쓰레기 집합체 같기도 하고, 유럽 미술(아상블라주)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어리숙하고 어딘가
우스꽝스러운(goofy, 구피...), 감춰야 할 것 같아 눈치보다가 말이 잘못 나온 상황 같은, 무섭지만 나답고 싶은
욕망도 있다. 여전히 의심스럽고 그래도 괜찮다는 태도를 작업 과정에서, 그리고 삶에서 체득하고자 했다. 그
과정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고, 어떤 용기가 자라고 있는 것도 같다.


김지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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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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