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윤과 연나연은 두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충격적 사건을 중심으로, 공유된 충격의 정동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형식을 모색하며 2020년부터 함께 작업을 제작해
왔다. 소설 텍스트 속의 심상과 서사를 중심으로 한 2인전 《와와돔》(2023)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 《밑이 붙은 사람》에서 엄지윤과 연나연은 여성들의 집단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인용하여 퍼포먼스와 연극, 카메라의 매체를 통해 공적인 형태로 발전시킨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김류 집안의 여인들은 적군으로부터 ‘욕보이지’ 않기 위해 4대가 모조리 자결한다. 이들의 비극은 사료 속에 정녀(貞女), 열녀(烈女)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 국가에 의해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는 몸체를 획득한 채 숭고한 절개의 표지로 높이 추앙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사지
절단하듯 단일한 기표로 잘라내어 고정된 시각에 머무르게 만든다.
엄지윤과 연나연은 이러한 텍스트의 성질에서 ‘비정(非情)함’을 발견하고, 이 비정함의 형식을 영상 작업의 언어로 채택한다.
‘죽는 것이 옳다’며 자살을 강요하던 시대상 속 여성들의 죽음은 오늘날 사회적 타살로 인식되며 인용의 시차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개인적-집단적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주체의 결단을 지워버리고 그들을 수동적인 여성상으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텍스트의 형식,
다시 말해 행위에서 당위와 원인을 추출하는 형식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엄지윤과 연나연은 이처럼 역사가 망자에게 거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의 판에서 한 발 동떨어져, 비극과의 시대적 거리를 “긍정적 조건으로 딛고 다르게 볼 수
있는 지평”을 사유하기 위하여 공간 파도를 상이한 인용들의 교차점으로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은 효과는 비록 “죽은 자들이 말하지 못하더라도 이 작업을 듣는 존재들로 여기기” 위한 결과이다.*
< 밑이 붙은 사람 >은 작가의 개인적 기억을 바탕으로 가공된 재현과, ‘죽음이 없는 세계’를 다룬 우화적 이야기,
그리고 여성들의 몰살에 관한 문헌 사료가 다층적인 액자 구조를 이루며 병치된다. 영상에서 텍스트는 단순하게 문자화된 형태로 제시되지 않으며, 롤
스크린과 빔 프로젝션 등 수작업의 흔적이 드러나는 물리적 장치를 통해 이미지화된다.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충돌은 관객을 선형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끊임없이 ‘날려
보내’고 관객으로 하여금 허구와 현실, 기록과 기억이 미끄러지는 다층적 세계를 직접 감각하도록 만든다.
소품과 커튼, 조명 같은 장치의 조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 역시 재현의 가공성과 인위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기록을 통해 구축된 세계가
‘자연스러운 진실’이 아닌 선택된 행위임을 강조한다.
< 김류 집안 이야기 >는 < 밑이 붙은 사람 >과 동일한 문헌의 텍스트에서 시작하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여성들 각각의 얼굴을 조명하는 시도가 돋보인다.
영상 속 기울어진 텍스트를 물리적으로 바로잡고, 어루만짐으로써 이름 붙이는 행위를 통해 관객은 고정된
표지 이면에 존재하는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상상해 보게 된다.
엄지윤과 연나연에게 창작의 조건이자 시발점이 되었던 ‘집’의 구조를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 밑이 붙은 사람 >의 배경은
공간 파도의 실내를 분할하는 넓은 가벽과 둥근 돔 모양 조각으로 연결된다. 이는 작품 속 세계와 전시공간을 연결하는 물리적 단서로, 영상
내 사료 텍스트가 투사되는 깨끗한 석판(타불라 라사)이자 작품이 스크리닝되는 전시장의 스크린 표면으로 기능한다.
육중한 양감을 뽐내면서도 가벼움을 과시하듯 임시 가벽에 높이 매달린 < 배-벽-무덤 > 조각은 죽은 몸이 묻힌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잉태를 암시하는 신체로, 또 상이한 인용들의 겹쳐짐을 위한 장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 (작가가 인용 및 윤문한 구절을 따라) … 추측에 맡긴다.
* 엄지윤, 연나연, 작가노트 발췌.
| 기획과 글 : 김윤지
| 사진: 김윤지
| 주최 : 공간 파도
서울 마포구 고산7길 23 1층
*< 밑이 붙은 사람 >영상은 30분 간격으로 정시에 상영됩니다.